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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

09.11.22._지리산

"그토록 힘든 산을 왜 오르는가?" 질문에 "저기 산이 있기에"라고 대답하신 분이 누구셨죠?
검색해보니 에드워드 힐라리경이시군요.

저기 지리산이 있기에, 지리산을 다녀왔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산행 초보에 저질 체력을 지닌 저로서는 상당히 무모한 도전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엇보다 저질 체력은 저를 절망케했는데요, 천왕봉을 0.6km 앞둔 지점에서 그만 정상에 오르는 건 포기하고 다시 산을 내려갈까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정상은 다음에 밟지 뭐, 지금 꼭 가야하나, 이런 생각이 제 머릿속을 지배했고, 장담컨대 아마 혼자였다면 포기했을 것 같습니다.

제가 너무 느리게 움직여서 예상보다 많은 시간을 초과했고, 나중에 한 등산객분에게서 이렇게 느릿느릿 움직이면, 해가 진 산을 내려와야 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의 말씀을 들었는데, 정말 나중에는 그 분 말씀대로 돼버렸습니다.
인적 없는 산길을 내려오는 그 공포, 제 생전 이런 공포는 처음 맛본 것 같은데요, 제겐 웬만한 괴기영화보다 더 무서웠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반달곰과 마주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슴에 지닌 채, 헤드랜턴 하나에 의지해서 그 산길을 내려왔다는게 꿈만 같습니다.ㅠㅠ

장터목대피소에서는 오후 4시 20분이면 사람을 잡고, 하산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산에서는 해가 일찍 지기 때문이라는군요.
저랑 오라버니가 장터목 대피소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4시 10분, 원래는 여기서 커피라도 한잔 마시고 움직이려고 했는데 빨리 안내려가면 안된다는 말에 쉬지도 않고 중산리까지 내려왔습니다.
내려오는 길에는 사람이 저희밖에 없었는데, 사위는 어둑어둑해지고, 인적없는 산길은 적막 그 자체로, 바람에 부스럭거리는 잎새소리, 새의 퍼드득거리는 날갯짓 한 번에도 무서움에 쪼는 경험을 했습니다.
앞으로 내딛는 다리는 후덜후덜 떨리고, 주저앉고 싶은 마음도 수십번, 그래도 빨리 내려가야 한다는 생각 하나에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머릿속에서는 얼마를 더 걸어야하나 이 생각만 가득한데, 저 멀리서 인가의 야간 조명이 보였을 때, 그 기분, 그 안도감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정말 이제는 살았구나, 이제는 집에 갈 수 있구나, 오늘 밤 무사히 집에 가겠구나 이 생각이 들었을 때는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답니다. ^^

정말 정말 힘든 산행이었는데, 그래서 정말 정말 힘들었다, 고생했다라고 말할 수 있고, 아직도 다리의 통증이 가시지 않는데도 이 기분은 뭘까요?
또 가자고 한다면, 데려가주기만 한다면, 또 갈 수 있을 것 같은 이 기분요.

눈을 감으면 정상에서 봤던 능선과 산과 산 사이에 들어앉은 마을이 눈에 그려집니다. 포근하고 따스할 것 같은, 마치 어미 닭이 달걀을 품고 있는 듯한 그 마을이 말이예요.
이게 그리움일까요?

지리산 천왕봉에는 NO, 케이블카라는 현수막이 있습니다. 산을 다녀오고 나니, 케이블카라니 웬말이냐 라는 생각이 듭니다.
천왕봉 한 번 갔다 온다는게 중요한건가요?
이제 겨우 산행의 시작을 한 제가 이런 말하는 것이 우습긴 하지만요, 이번 지리산을 갔다와서 느낀게 정상을 밟았다는게 중요한 게 아니고, 정상까지 가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니죠. 산행을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까지요.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무언가를 배우는 것 같아요.
전 이번 산행에서 미지의 공포와 극한의 인내, 그리고 사람이 얼마나 안도감을 주는 존재인가를 배웠답니다.

그리고 제가 케이블카를 반대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요, 바로 이것때문입니다.
제가 산을 많이 다닌 건 아니지만, 산에 있는 험한 바위길 보다 더 힘든 건, 사람이 만들어 놓은 인공의 계단이더라구요.
저만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저는 이런 계단들 진짜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편하라고 만들어놓은 것 같은데, 오르다 보면 이게 더 힘들거던요.
이번 지리산에서는 이 계단을 오를 때 네 발로 엉금엉금 기어올라갔습니다.ㅠㅠ
사람이 만들어놓은 모든 게 다 편한 것만은 아니더군요.
이렇는데 지리산에 케이블카가 꼭 있어야만 할까요?

지리산을 다녀왔습니다.
저기에 지리산에 있기에 다녀왔고, 기회가 닿는다면 또 가고 싶은 맘이 굴뚝 같습니다.
제겐 너무 힘들었던 산행이었고, 그만큼 보람도 큰 산행이었던 같습니다.

다리가 풀리지 않아서, 다리를 풀겸 오랜만에 108배를 하는데, 제가 108배를 할 때마다 틀어놓는 참회문에서 이런 구절이 들리더군요.
모든 생명은 소통과 교감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어 감사한 마음으로 절합니다.
왜 이 구절이 갑자기 귀에 쏙 들어와 박혔을까요? 그 이유는 제가 그 산에서 간절하게 빌었기 때문일 겁니다.
이 산을 무사히 내려갈 수 있게 해달라고. 집에 무사히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지금 생각해도 그 어두운 산길을 무사히 내려올 수 있었던 건, 그 자연이 우리를 돌봐주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원지에서 서울 요금 20,000원이 눈에 띄지 않습니까?


눈앞에서 포기할 뻔 했던 천왕봉입니다.ㅠㅠ

앞에는 천왕봉, 뒤에는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요.
저도 이 분처럼 이 돌을 만져 보았습니다.^^

이번 산행에서 제가 가장 좋아한 길입니다. 전 이 길이 참 좋더라구요.
시간이 넉넉했더라면 좀 더 여유를 갖고 걸었을텐데 그렇지 못해 아쉬워요.ㅠㅠ

정상의 나무는 대체로 이런 모양이예요. 바람을 견디며 서 있는 모습이 정말 인상적이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