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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

아나톨 프랑스와의 조우

모든 변화들은 그것이 자신이 원하던 일일지라도 슬픈 구석이 있다. 우리가 뒤에 남기고 온 것은 우리의 일부이며 새로운 내가 되기 위해 과거의 나를 버려야 하기 때문에.

마치 내 맘을 대변하는 듯한, 이 말의 슬픈 울림이 좋아서, 난 이 말의 여운을 한참이나 음미했다. 그리고 갖고 있던 공책에 이 말을 적었다.
이 말을 한 사람은 아나톨 프랑스. 그 이름은 내게 생소했고, 다시 만나는 일이 없었으면 아마 그냥 스쳐 지나갔을 이름이었다.

예전에 한 번 읽었던 유시민의 『거꾸로 읽는 세계사』를 다시 읽었다. 드레퓌스 사건을 시작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리고 몇 장 넘기지 않아서 그의 이름이 보였다.

드레퓌스사건을 소재로 장편소설을 쓴 적이 있는 작가이자 비평가인 아나톨 프랑스는 장례식에서 졸라의 삶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pp.29~30)

'에밀 졸라의 조사를? 그는 유명한 사람이었구나. 어떤 사람이지?'
 
갑자기 그가 궁금해져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난 예전에 그의 이름을 만난 적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프랑스의 저명한 소설가 미셸 투르니에가 문학에 투신한 이유는 선험적인 해학이다. “1924년 10월14일 문학과 축제를 너무나도 좋아했던 젊은 어머니가 나를 잉태한 채 소설가 아나톨 프랑스의 국장(國葬)에 참가하게 되었다. 두 달 뒤인 12월19일 태어난 나는 장례식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했지만 어머니 뱃속에서 당시의 조사(弔辭)와 조가(弔歌)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들었다. 그걸 듣고 숙명적으로 소설가가 될 수밖에 없었다.”


'나도 이 글을 읽은 적 있어. 이거 분명 미셸 투르니의 『외면일기』에서 읽었던 거야.
만난 적 있었네. 그것도 여러 번. 근데 왜 여태껏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것도 몰랐지?
관심을 안가진다는 게 이런 거야? 여러 번 만났는데도, 만난 적이 있는 걸 모르는 거.'
 
인연이 되려면 세 번은 만나야 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나와 그는 이렇게 세 번을 만났다. 어쩌면 더 만난 적이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기억나는 건 이 세 번뿐.

이렇게 난 아나톨 프랑스를 알게 되었다.

아나톨 프랑스(anatole france 1844년 4월 16일~1924년 10월 12일)는 프랑스 작가 자크 아나톨 프랑수아 티보(jacques anatole françois thibault)의 필명이다. 1921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필명 '프랑스'는 그의 아버지 프랑소와의 약칭이기도 하지만, 조국 프랑스에 대한 그의 강한 애국심을 표현하기 위해 지은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