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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

영웅의 얼굴에 몸종의 심장

차일드 44 - 10점
톰 롭 스미스 지음, 박산호 옮김/노블마인

"그들은 날 노리고 있었던 게 아니야. 당신을 노리고 있었지. 생판 모르는 사람들을 체포하면서 당신은 그들이 유죄일 거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을 기만할 수 있었어. 당신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지. 하지만 그들은 그걸로 만족하지 않았어. 그들은 당신이 마음속으로는 옳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들이 시키는 것은 뭐든 할 수 있다는 걸 보고 싶었던 거야. 그들은 당신이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걸 보고 싶었지. 그런 점에서 마누라 테스트는 꽤 쓸모 있었던 거야."(p.205)

주인공 레오의 직장(국가 안보부)은 레오의 아내가 스파이라는 증거를 제시하며, 레오가 아내를 국제 스파이로 고발하기를 종용한다. 하지만 레오는 아내가 스파이가 아니라며 고발하기를 거부하고, 이에 둘은 그 거부에 상응한 대가를 받게 된다. 그것은 강등과 한직으로의 좌천.

레오는 그동안 누려왔던 특권에서 배제되는 걸 힘들어하고, 이 모든 게 아내의 잘못인 것 같아, 아내를 탓한다. 위에 말은 그 때, 아내가 레오에게 했던 말이다.

그들은 당신이 마음속으로는 옳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들이 시키는 것은 뭐든 할 수 있다는 걸 보고 싶었던 거야. 그들은 당신이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걸 보고 싶었지. 그런 점에서 마누라 테스트는 꽤 쓸모 있었던 거야.

그런데 옳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이게 과연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20세기 구소련 스탈린 정권하에서만 일어났던 일일까?

국무총리실의 민간인 불법사찰, 감사원의 민간인 불법 계좌추적,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엄연히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그럴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만약 이런 조직에 속해 있어, 이런 일을 하라고 명령받는다면 난 거부할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하면 난 거부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래서 난,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우리는 언제쯤이면 마누라 테스트를 당하지 않으며 살 수 있을까?

우리가 영웅의 얼굴에 몸종을 심장을 지니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레오가 했던 노력이 필요함을 느낀다.
그래서 자문해 보았다.

'넌 레오가 될 수 있니?'


차일드 44 - 10점
톰 롭 스미스 지음, 박산호 옮김/노블마인

이 책을 읽으면서, 오류를 인정하지 않는 건 발전의 기회를 없애는 것이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닫긴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