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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소리

그대, 어현기

나는 수많은 그대중의 하나가 쓴 시를 달빛에 비춰본다.


스스로 탄식함은 내가 원래 다정하여 시름이 많음이니
하물며 가을 바람 불고 맑은 달 마당 가득 비치는 계절임에랴.
침실 곁에서 들리는 저 지겨운 때를 알리는 북소리,
밤마다 나는 등불 앞에서 저 소리 들으며 머리가 세어진다.

自歎多情是足愁 況當風月滿庭秋
洞房偏與更聲近 夜夜燈前欲白頭


연인과 사랑에 빠진 시녀를 시기해 채찍질로 죽였다는 그대. 그 일로 인해 스무여섯살에 처형됐다는 그대. 가을의 한(秋怨)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쓴 그대.

- 김연수의 『청춘의 문장들』(p.94)


난 그대의 이름을 찾아 헤매었어.
그리고 그대가,
얼굴은 나라를 망하게 할 만큼 미인이고, 글의 구상은 신의 경지에 들어갈 정도이며, 책을 읽고 글을 짓는 것을 좋아하여, 하나 짓고 읊조리는 것에 정성을 다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그대, 어현기.
그대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난 그대가 시녀를 죽이게 된 경위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어.
"그 사람 오면 전해줘. 내가 어디어디 가 있다고."
당신은 녹교에게 신신당부하며 이 말을 했겠지?
녹교에게서 알았어요. 꼭 그렇게 말하겠어요, 라는 답변도 받아내겠지.
그리고 그 곳에서 내내 그를 기다렸겠지.
그래서 녹교가 그를 유혹하여 보내지 않은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정말 울화가 치밀어겠지.

그런데 난 그대의 살인이 참 안타깝다.
그대는 그렇게 예쁘고, 그렇게 글재능이 넘치는데,
어쩌면 그 사람보다 더 좋은 인연을 만나게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사랑에 버려졌던 한 번의 경험이 그대를 망쳤던걸까?


섬돌엔 귀뚜라미 어지럽게 울고, 정원의 나무끝엔 안개가 맑네.
달이 뜰 때는 마을 동쪽이 시끄럽고, 누대 위엔 멀리 뜬 해가 밝네.
침상의 대자리엔 서늘한 바람이 일어, 거문고에 노래를 부르면 한스러움만 생기고,
당신은 편지쓰는 것이 게으르니, 도대체 무엇으로 가을의 외로움을 위로할까?
階砌亂蛩鳴, 庭柯煙霧淸.
月中隣東響, 樓上遠日明.
枕簟凉風著, 謠琴寄恨生.
稽君懶書禮, 底物慰秋情

당신은 편지쓰는 것이 게으르니, 도대체 무엇으로 가을의 외로움을 위로할까?
그대가 쓴 시 한구절이 내내 마음 한 구석을 젖어들게 만든다.
기약없는 기다림만큼 안타까운게 또 어디 있을까?

내 사랑은 여기 있어요, 당신 바로 뒤.
그러니 제발 돌아봐주세요.
라고 외치는 그대의 외침이 내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